Friday, February 26, 2010

[Around the World] 클린턴 "남아共이 북한산 무기 압류" 확인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26/2010022600120.html

"北 2004년 美핵전문가에게 플루토늄 공개"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26/2010022600254.html

'햇볕 중독증' 못 벗어난 北

③ 월드컵 공동 응원, 식량 5만t 달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26/2010022600162.html

급물살 '월드컵 남북 이벤트' 北의 돌출 요구에 물건너 가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의 표정이 요즘 계속 어둡다. 세종시 논란 등 정치 현안도 현안이지만 '축구인'으로서 의욕적으로 지원하던 남북 공동 응원단과 남북 축구 교류전 등 일련의 '월드컵 남북 이벤트'가 사실상 무산됐기 때문이다. 민간 단체들은 오는 6월 개최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사상 처음으로 남북 축구가 동반 진출한 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남북 공동응원단' 구성을 추진해왔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주평통도 이를 공식 건의사항에 포함시키는 등 분위기를 띄웠다. 이에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을 겸하고 있는 정 대표도 공동 응원단 파견과 관련해 통일부 등의 지원을 요청하는 등 가능성을 타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정 대표는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남북 축구 교류전을 여는 방안을 축구협회 등과 논의했고, 평양에 실무 협상단을 파견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측이 남북 공동 응원단과 관련, 민간 루트를 통해 "응원단 전원의 항공료, 현지 숙식비와 별도로 식량 5만t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일이 어려워졌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가를 지불하는 식의 남북 교류에 대해 정부가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북 정상회담 등의 '빅 이벤트'를 앞두고 찔끔찔끔하는 식의 남북 교류에도 소극적이어서 공동 응원단과 남북 축구 교류전 등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관계자는 25일 "향후 남북관계 상황 및 민간 단체의 여건 등을 고려해 검토하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물리적으로 힘들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정 대표는 최근 한 모임에서 남북 축구행사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벽에 막힌 것에 대해 상당히 낙담해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남북 축구 이벤트가 성사됐을 때 그 후광효과를 '정치인 정몽준'이 누리게 되는 것을 견제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Thursday, October 15, 2009

[JBC간추린 뉴스] '북한, 5·16 쿠데타 예견…지지성명 준비' 외[중앙방송]

북한, 5·16 쿠데타 예견하고 지지 성명 준비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branch=&art_id=924533

<앵커 멘트>

오늘은 KBS 단독 보도로 시작합니다. 북한이 5.16 쿠데타를 예견하고, 지지 성명까지 준비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KBS가 입수한 중국 비밀외교 문서를 워싱턴 정인석 특파원이 공개합니다.

<리포트>

26페이지 분량의 중국 외교 기밀문서는 5.16 쿠데타 당일 저녁 북한 수뇌부의 움직임을 처음 밝혔습니다.

김일성 당시 수상은 부수상 김일을 시켜 급히 중국 대사를 만나게 했습니다.

특히 5.16 쿠데타 지지 성명을 준비 중이라고 중국에 미리 알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녹취>신종대(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지지 성명까지 검토하고있었다는 점은 5.16 주도세력에 대해 북한이 상당히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었다는 거죠.”

여러 정황상 군내 진보세력에 의한 독자 쿠데타로 보인다, 미국의 사주가 아닐 가능성이 90%라는 겁니다.

북한은 가담한 군인 상당수가 진보 성향이라고 풀이하면서 미국이 장면 정권 지지를 선언하고 있다고 중국에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박정희 당시 소장이 한때 남로당에 연계됐었다면서 그 형도 이른바 혁명 활동을 하다 숨졌다고 말했습니다.

<녹취>제임스 퍼슨(윌슨센터 연구원) : “쿠데타 직후 중국과 북한은 남한의 사태 전개에 대해 꽤 흥분했던 걸로 보입니다.”

특히 군내 진보세력이 반란을 꾀할 거란 정보를 이미 갖고 있었음을 밝혔습니다.

실제로 두달 반 전 작성된 또 다른 외교 문서에서 북한은 이같은 예견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북한은 최종 결론을 유보한 채, 하루 이틀 더 상황을 지켜보겠다면서, 중국에 정보제공을 요청했습니다.

워싱턴에서 KBS 뉴스 정인석입니다.

Saturday, October 10, 2009

“10월유신 선포, 北에 2차례 미리 알렸다”

본보 1971~72년 北외교문서 입수

http://news.donga.com/3//20090924/8813401/1

박정희 정부가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계엄 선포와 헌법 폐지, 국회 해산, 대통령 간선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유신(維新) 체제’를 선포하기 전에 두 차례 북한 당국에 이를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남측은 10월유신 선포 다음 날인 18일에도 북측과 다시 접촉해 “남북대화의 목적에 부응하는 체제를 만들 것”이라고 헌법 개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북한은 같은 해 7월 4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등 3원칙에 따라 남북통일을 이룬다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동유럽 사회주의 우방국들에 “한반도에서 미국과 일본을 몰아내 박정희 정권을 고립시키고 내부 혁명역량을 강화해 남북연방제 통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의 국제 냉전사를 연구하는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동독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북한 관련 외교문서를 입수해 분석함으로써 밝혀졌다. 우드로윌슨센터는 2006년부터 한국의 북한대학원대와 함께 ‘북한 국제문서 조사사업(NKIDP·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entation Project)’을 진행해 왔으며 1971∼72년 당시의 북한 관련 문서 39건(총 164쪽)을 영어로 번역했다.

동아일보가 단독으로 입수한 문서들에 따르면 김재봉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1972년 10월 19일 동유럽 6개국 외교관들을 만나 “16일 판문점 남북 접촉에서 남측은 박정희 대통령이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고, 17일 (10월유신) 발표 1시간 전에도 남측이 전화를 걸어 라디오를 주의 깊게 들으라고 알려왔다”고 전했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김일성의 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어 (통일을 위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 측에는 발표 하루 전에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발표할 성명 사본을 미리 전달했다. 나머지 주한 외교사절에게는 발표 3시간 전에 알렸다. 당시 남한 언론엔 유신 선포 사실이 사전에 보도되지 않았다.

한편 김일성 내각 수상은 1972년 9월 22일 정준택 부수상을 루마니아에 보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대남 평화공세(peace offensive)의 목적과 배경을 설명했다. 정 부수상은 “남한과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한 내부의 혁명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한 끝에 ‘평화공세’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 대남 평화공세에 대한 북한의 의도가 드러난 것은 북한이 표면적으로는 대화를 주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적화를 노렸다는 보수진영의 시각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선준영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유엔대사)는 “이들 문건은 최근 북한의 대외 유화 공세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Sunday, September 27, 2009

Friday, September 25, 2009

“1970년대초 南北정권 ‘적대적 공생관계’ 입증”

Park Cung-Hee's Lee and Kim Il-Sung
【1】 1972년 평양에서 2차례 열린 비밀회담에서 만난 김일성 당시 북한 내각수상(오른쪽)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2】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의 내용을 발표하는 이후락 부장. 【3】 7·4남북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기 위해 1972년 11월 4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가 끝난 뒤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는 이후락 부장(왼쪽)과 박성철 북한 내각 2부수상. 뒷줄 왼쪽부터 최규하 당시 청와대 특별보좌관, 장기영 전 부총리. 동아일보 자료 사진

http://www.donga.com/fbin/output?f=a_s&n=200909250093&main=1

北외교문서로 드러난 남북접촉… 전문가들이 본 의미
“국제정세 급변속 남북대화를 권력강화에 활용
朴정권, 유신에 대한 北 오해 살까봐 사전통보
北도 유신 두달뒤 헌법 바꿔 ‘수령절대체제’로”

《박정희 정부가 1972년 10월유신을 선포하기 전 두 차례에 걸쳐 이를 북한에 예고했다는 내용 등을 담은 동유럽 외교문서들은 남북 관계사의 이면을 규명하는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학계는 당시 남북한이 모종의 사전 교감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해 왔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南 “1시간뒤 비상사태 선포… 잘 들어보라” 北에 전화통보
北 “7·4성명은 대남혁명을 위한 평화공세”

이번에 발굴된 문서들은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반 북한 및 남한 현대사의 서술 작업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

1971년 이후 대화를 진전시켜온 남북한 정권은 당시 은밀한 교감을 통해 분단 이후 가장 가까운 관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바탕 위에서 남한은 통일과 남북관계를 명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강화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문서들은 우선 1970년대 초 남북한이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국제정치나 국내정치 차원의 규명 작업에 훌륭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1970년대 초반 급변하는 국제정세(동서양 진영 간 데탕트) 속에서 북한은 중국을, 남한은 미국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는 비슷한 처지에 처했다”며 “두 나라는 남북대화와 독재 권력의 공고화라는 비슷한 형태로 대응했다는 사실이 문서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문서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던 김일성, 박정희 정권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남북한 당국은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른 남북대화와 통일논의를 각자 자신의 권력 강화에 최대한 활용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0월유신 선포 하루 전인 16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질서’란 박 대통령이 선거와 야당, 언론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독재구조였다. 북한도 두 달 뒤인 같은 해 12월 새 헌법을 만들어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수령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남북은 같은 길을 걸었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는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수립의 명분으로 남북대화와 통일을 제시했기 때문에 북한의 오해로 남북대화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라며 “박정희 정권에 남북대화의 유지는 유신체제를 안착시키는 수단이었다는 점이 이 문서들을 통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남한이 북한에 10월유신을 예고한 것은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이후락 부장의 행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문서들은 1970년대 남북대화에서 이 부장 개인의 역할을 더욱 부각하는 사료라는 평가도 나온다. 우드로윌슨센터와의 문서발굴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신종대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북한을 방문해 7·4공동성명을 이끌어낸 이 부장이 10월유신에 대한 북한의 오해로 남북대화가 끊어질 것을 우려해 사전에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 부장이 스스로 박 대통령의 2인자라고 생각했으며 남북대화라는 업적을 통해 정치적 야망을 키웠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평양 주재 동독과 불가리아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이 부장은 북측과의 대화에서 북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종종 과감한 양보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회의에서 남측 위원장이던 이 부장은 박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일”을 언급한 것을 북측이 따져 묻자 “그 표현은 언론인들이 넣은 것”이라면서 남측의 실수임을 인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이 1971년부터 겉으로는 대남 평화공세를 폈지만 속으로는 남한 정권의 국내외적 고립과 내부의 혁명 역량 강화를 통한 적화통일을 노렸다는 사실도 북한의 진술을 통해 확인했다. 신 교수는 “당시 박 대통령과 정책결정 라인에 있었던 정부 당국자들이 북한 평화공세의 의도와 배경 등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은 국내외 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할 때 과감하게 평화 공세를 펴 왔다”며 “최근 북한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유화 공세를 펴는 것도 당시 상황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대외 정세를 오판 또는 왜곡했던 흔적도 이번 문서에 드러났다. 서 원장은 “남한 주민들이 7·4공동성명에 환호하면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있다는 대목과 남측이 적십자회담을 판문점에서 열자고 한 것이 서울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북측 대표단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부분 등은 남한 정세에 대한 무지 또는 의도적 왜곡”이라며 “김일성 수상을 기분 좋게 하려는 사실 왜곡이 역설적으로 지도자의 판단을 흐렸고 지금도 북한 지도부 내에서는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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